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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 다시 읽기/신들의 이야기

하데스와 페르세포네 – 죽음과 봄의 신화

by 리안과의 만남 2025. 3. 24.

들판을 스치듯 찾아오는 이름

봄이 찾아올 때마다 들판을 스치는 바람 속에서 사람들은 한 여신의 이름을 떠올린다. 

페르세포네. 

 

꽃이 피고, 새싹이 돋고, 생명이 다시 깨어나는 시기. 

그녀는 봄을 데려오는 존재로 기억된다.

하지만 이 이름 속에는 단지 계절의 여신만이 아닌, 더 깊고 복잡한 이야기가 숨어 있다.

 

순수한 소녀의 탄생

페르세포네는 대지의 여신 데메테르와 하늘의 신 제우스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다.

'코레(Kore)'라 불리며 소녀의 순수를 상징하던 그녀는 들판에서 꽃을 꺾으며 지상의 빛과 생명 속에서 자라났다.

 

그러던 어느 날, 저승의 신 하데스가 그녀를 지켜보게 된다.

그는 그녀에게 매혹되지만 다가서지 않고, 제우스의 승낙을 받은 후 지하의 균열을 통해 솟아올라 그녀를 납치했다. 

검은 말이 끄는 전차에 실린 페르세포네는 그렇게 하데스의 세계로 끌려갔다.

 

페르세포네를 납치하는 하데스

 

어머니 데메테르의 절망, 멈춰버린 생명

페르세포네의 비명은 대지에 묻히고, 하늘은 모른 척했다.

딸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 대지와 곡물의 신 데메테르는 모든 신적 능력을 거두었다. 

이로써 꽃도, 곡식도 자라지 않게 되었고, 지상은 죽음과도 같은 침묵에 잠겼다.

 

그녀는 인간의 옷을 입고 엘레우시스라는 마을로 내려가 하녀로 살며 딸을 찾기 시작했다.

세상은 굶주림과 추위로 무너졌고, 인간의 제사와 믿음으로 유지되는 신들의 세계 또한 흔들렸다. 

데메테르의 침묵은 곧 신들의 힘의 상실을 의미했다.

 

엘레우시스를 떠도는 데메테르

 

석류 한 알이 만든 운명

데메테르가 자신의 신적 능력을 거두자 결국 신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제우스는 사태를 수습하고자 메신저 헤르메스를 하데스에게 보냈다.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번진 것을 알게된 하데스는 페르세포네를 돌려보내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이미 그녀는 저승의 음식인 석류 씨앗을 먹은 상태였다. 

고대 그리스에서 석류는 결혼과 결속의 상징이었고, 명계의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그 세계에 속하게 됨을 뜻했다. 

석류를 먹음으로써, 그녀는 단순히 납치당한 존재가 아니라, 명계의 일원이 된 것이다.

 

봄과 겨울의 타협

결국 

페르세포네는 해마다 일정 기간은 지상에서 어머니와 함께하고,

나머지는 하데스와 저승에서 보내는 것으로 타협이 이루어졌다. 

 

이로써 계절은 순환하고, 세상은 다시 숨을 쉬기 시작했다.

봄은 그녀의 귀환이었고, 겨울은 그녀의 부재였다. 

계절의 변화는 곧 그녀의 이동을 의미하게 되었다.

 

저승에서 지상으로 돌아오는 페르세포네

 

피해자가 아닌 여왕으로

그녀는 단순한 피해자가 아니었다. 

하데스의 곁에서 명계의 여왕으로서 자리를 지킨 페르세포네는 저승의 재판에 참여하고,

죽은 자들의 혼을 판단하며, 질서와 정의를 유지했다.

 

 『오디세이아』에서는 오디세우스가 저승에서 하데스보다 먼저 그녀의 이름을 부른다.

그만큼 그녀는 명계에서 신성하고 중심적인 존재로 자리 잡았다.

 

저승에서 여왕으로 앉아 있는 페르세포네와 하데스

 

삶과 죽음, 그 경계에서

페르세포네의 이야기는 단지 계절 변화의 설명이 아니다.

그것은 삶과 죽음, 상실과 재회, 소녀와 여왕, 빛과 어둠 사이의 균형에 관한 이야기다.

그녀는 단지 끌려간 소녀가 아니라, 새로운 삶을 받아들인 존재였다.

그녀의 변화는 불완전한 운명 속에서 스스로를 다시 세우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죽음을 지나 생명으로

고대 그리스의 엘레우시스 제의에서도 그녀는 중심이었다.

이 제의는 죽음을 통과의 문으로 여기며, 페르세포네를 통해 죽음 너머에도 생명이 있다는 희망을 믿도록 이끌었다.

그녀는 단지 희생자가 아닌, 죽음의 안내자로서 숭배되었다.

 

그래서일까. 우리가 삶의 어떤 겨울을 지날 때마다, 그녀의 귀환을 기다리게 된다. 

봄은 결국 찾아오고, 그녀는 다시 들판을 스치며 우리 곁으로 돌아온다.

그 이야기는 지금도, 우리가 어둠을 지나고 있을 때 조용히 속삭인다.

 

“겨울이 왔지만, 봄은 반드시 돌아온다.”

 


엘레우시스 제의 – 죽음을 넘어선 신비의 통로

고대 그리스에서 하데스와 페르세포네의 이야기는 단지 신화로 머무르지 않았다.

이 신화는 엘레우시스 제의(Eleusinian Mysteries)라는 신비롭고 엄숙한 종교 의식의 핵심이었다.

 

엘레우시스 제의는 아테네 근교 엘레우시스라는 마을에서 매년 가을에 열렸으며, 참가자들은 일정한 조건

(그리스어를 할 줄 알고 살인을 저지르지 않은 자)을 충족해야만 했다.

 

이 제의에 참여한 자들은 신성한 음료 키케온(Kykeon)을 마시고, 암전 속에서 신비로운 체험을 하게 되었으며,

그 내용을 외부에 발설할 수 없도록 맹세했다.

 

제의의 중심은 데메테르가 딸을 잃은 슬픔, 그리고 다시 재회하는 과정을 의례적으로 재현하는 것이었다.

이 체험을 통해 사람들은 죽음이 끝이 아님을 깨닫고, 죽은 자 역시 또 다른 삶의 가능성을 지닌 존재로 인식하게 되었다.

 

고대인들은 이 제의를 통해 죽음을 두려움의 대상이 아닌, 생명 순환의 일부로 받아들였다.

엘레우시스 제의는 결국 하데스와 페르세포네의 이야기 속에 담긴 상실과 귀환, 죽음과 재생의 주기를 신비롭게 상징하며,

삶과 죽음의 경계에 대한 깊은 철학적 통찰을 제시하는 제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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