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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교양 한 스푼/사물의 유래

포크의 기원 – 농기구에서 귀족의 식사도구가 되기까지

by 리안과의 만남 2025. 5. 12.

우리는 오늘도 포크를 집어 식사를 한다.

스테이크를 썰고, 파스타를 감고, 때로는 케이크 한 조각을 살며시 들어올릴 때도.

하지만 너무도 익숙한 이 도구가 사실은 한때 ‘신을 모욕하는 물건’으로 여겨졌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포크의 시작은 농기구

‘포크(fork)’라는 단어는 라틴어 furca(포르카)에서 왔다.

원래 뜻은 ‘갈래진 나무 막대기’, 즉 농사일에 쓰이던 쇠스랑이다.

고대 로마에서는 이 ‘furca’를 이용해 건초를 퍼올리거나 불에 음식을 걸어 익히는 데 사용했다.
하지만 이 시기의 포크는 식사도구가 아니었다. 단지 불과 가까운 곳에서 조리를 보조하는 도구였을 뿐이다.

 

최초의 식사용 포크는 ‘비잔틴 제국’에서 등장

시간이 흐른 뒤, 11세기경 비잔틴 제국의 궁정에서 금이나 은으로 만든 작고 정교한 

이빨 달린 도구가 귀족들의 식사에 등장한다. 이때 비로소 포크는 ‘식사용 도구’로 기능하게 된다.

 

특히 유명한 일화가 있다.

베니스의 도제 아르스텔로 2세의 아들 오토네가 비잔틴 공주 테오도라와 결혼했을 때,

신부는 황금으로 만든 포크를 지참품으로 가져왔다.

이 귀한 도구는 곧 베니스 상류층 사이에 ‘새로운 식사 예법’으로 퍼져나갔다.

하지만 이 행동은 기독교 사회에선 경악할 일이었다.

 

포크는 한때 ‘신에 대한 오만’의 상징

11세기 유럽의 가톨릭 신앙은 인간의 육체와 쾌락을 경계했다.

손으로 음식을 먹는 것은 ‘신이 인간에게 준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여겨졌고,

도구를 사용해 먹는 행위는 “신이 준 손을 거부하는 죄악”으로 여겨졌다.

교회는 포크를 ‘사치의 상징’, ‘허영의 도구’, 심지어 ‘마귀의 발톱’에 비유하며 사용을 금기시했다.

실제로 베니스에 시집온 비잔틴 공주 테오도라는, 포크를 사용한 지 몇 해 지나지 않아

전염병으로 사망했는데, 당시 성직자들은 “신의 분노가 내린 것”이라 해석했다.

 

 

르네상스 이후, 다시 귀족의 식탁에 오른 포크

시간이 흐르고, 15세기 이후 르네상스와 함께 위생 관념이 점차 강조되면서 포크는 재조명되기 시작한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역시 궁중에서 포크의 필요성을 강조했고, 프랑스 루이 14세 시대에는

귀족 사이에서 포크와 나이프 세트가 우아한 식사의 상징으로 자리잡게 된다.

특히 프랑스의 루이 13세 부인 앤 여왕은 포크 사용을 널리 퍼뜨린 인물 중 하나였다.

그녀의 궁중에서 포크는 이제 ‘절제되고 세련된 태도’의 표식이 되었다.

포크는 사치가 아닌 예절이 되었고, 유럽의 상류 사회에 천천히 스며들었다.

 

포크의 대중화

산업혁명 이후 철기와 은기의 대량 생산이 가능해지면서,

포크는 이제 귀족의 전유물이 아닌 중산층의 식탁으로도 퍼지기 시작했다.
미국은 영국보다 포크 도입이 더딘 편이었지만,

19세기 후반에는 북미 전역에서도 포크가 일반 식기류의 기본으로 자리잡았다.

지금 우리가 흔히 쓰는 네 갈래 포크(four-tine fork)는 19세기 이후에나 널리 보급되기 시작했다.

그 전까지는 두 갈래, 세 갈래 포크가 주로 사용되었다.

 


시간을 꿰뚫는 작은 사물

이제 식사할 때마다 손에 쥐는 이 도구는,

수천 년 전 농기구로 시작해, 비잔틴 궁정의 장신구, 중세 교회의 금기, 르네상스의 예절,

그리고 산업사회의 표준을 거쳐 우리에게 당도했다.

포크는 단지 음식을 찍는 도구가 아니다.
그건 인간이 음식을 대하는 태도, 문명을 구성해가는 손끝의 문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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