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비콘 강을 건넌 시저 – 한 정치가가 바꾼 로마의 운명
로마의 한 정치가가 작은 강을 건너면서 역사는 다시 쓰이기 시작했다.
그의 이름은 시저, 그리고 이 이야기는 단순한 정복이 아니라 ‘황제의 길’로 향한 결단의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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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한 귀족 가문에서 시작된 야망
기원전 100년, 로마의 귀족 가문 율리우스 씨족에서 한 아이가 태어났다. 이름은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훗날 '시저'로 불릴 이 인물은 한때 몰락했던 귀족 가문의 후예로 다시 권력의 중심에 서고자 일찍부터 야망을 품었다. 그는 정치적 동맹과 정략결혼을 통해 로마의 관직 코스를 밟아가며 집정관의 자리에까지 오른다.

그의 권력 기반에는 세 사람의 연합, 제1차 삼두정치(트리움비라투스)가 있었다. 시저, 폼페이우스, 크라수스—각자의 힘을 결합해 원로원과 보수 귀족들을 압박했던 그들의 동맹은, 로마 정치 질서를 뒤흔든 새로운 시작이었다.

갈리아 전쟁 – 군인 정치가의 탄생
집정관 임기를 마친 시저는 갈리아 총독으로 임명되어 북방 전선으로 떠난다.
기원전 58년부터 시작된 갈리아 정복 전쟁은 무려 8년간 이어졌고 시저는 이 전쟁을 『갈리아 전기』에 남긴다. 이 기록은 단순한 군사보고가 아니라, 대중에게 자신의 리더십과 정당성을 어필하는 강력한 정치적 수단이었다.
이 정복은 단순히 영토 확장만이 아니었다. 시저는 갈리아 원주민들을 상대로 수많은 전투를 치르며 군사적 명성을 쌓았고 막대한 전리품과 충성스러운 군대를 손에 넣었다. 특히 갈리아 부족 연합을 이끈 베르킨게토릭스를 물리친 알레시아 전투는 그의 지휘 능력을 결정적으로 입증한 전환점이었다.
이제 그는 로마의 가장 강력한 장군이자 가장 두려운 정치적 인물이 되어 있었다.

로마로의 귀환, 그리고 긴장의 시작
갈리아 전쟁이 끝나자 시저는 로마로 돌아가 정치적 입지를 재건하고자 했다. 그는 이미 북부 유럽에서 수년간의 원정으로 명성을 쌓았고 충성스러운 군대와 함께 막대한 부까지 손에 넣은 상태였다. 그러나 그의 성공은 로마 원로원 특히 보수파 귀족들에게는 점점 더 큰 위협으로 다가왔다.
로마 공화정의 질서는 무장한 장군이 로마 본토로 진입하는 것을 엄격히 금지했다. 북이탈리아와 로마를 가르는 루비콘 강은 하나의 경계선이었다. 장군은 이 강을 넘기 전에 반드시 군을 해산해야 했고 이는 단순한 군사 절차가 아니라 정치 질서의 핵심 원칙이었다.
원로원은 시저에게 갈리아 총독 임기를 마치고 즉시 군을 해산하고 귀국하라고 명령했다. 겉으로 보자면 이는 법과 관습에 따른 당연한 요구였지만 시저에게 그것은 사실상 정치적 사형선고와 다름없었다.
당시 시저는 총독의 자격으로 ‘임페리움(imperium)’, 즉 법적 면책권을 갖고 있었다. 이는 그가 로마 밖에서는 기소될 수 없음을 의미했다. 하지만 군을 해산하고 로마로 돌아오면 이 특권은 사라진다. 그는 단지 한 사람의 시민이 되어 수많은 정적들의 고발과 정치적 공격 앞에 무방비로 노출되게 되는 것이다.
게다가 그의 옛 동맹이었던 폼페이우스는 이미 원로원과 손을 잡고 있었고 로마 시내의 병력 통제권까지 위임받은 상태였다. 이는 시저가 귀환하자마자 적의 영토 한가운데서 재판을 받게 될 것이라는 의미였다. 단순히 무장 해제가 아니라 자신을 잡아먹으려는 늑대들 앞에 홀로 서라는 요구였다.
루비콘 강 앞에서의 결단
기원전 49년, 시저는 북이탈리아의 작은 강 루비콘 앞에 선다.
이 강은 로마 공화정의 ‘상징적 경계선’이었다. 이곳을 군대를 이끌고 넘는 것은 곧 내전의 시작을 뜻하는 불법 행위였다.
그는 짧은 망설임 끝에 말한다.
“Alea iacta est” – 주사위는 던져졌다.
시저는 루비콘 강을 넘고, 로마로 진군한다. 이는 단순한 군사적 행동이 아닌 로마 정치 체제 전체에 대한 도전이었다. 원로원과 폼페이우스는 급히 남부로 도주하고, 시저는 로마를 무혈 입성한다.

종신 독재관(Dictator Perpetuo)이 된 시저
이후 벌어진 내전은 빠르게 전개된다. 시저는 폼페이우스를 추격해 이집트까지 향했고 그곳에서 이미 암살당한 그의 시신을 마주한다.
시저는 이집트에서 클레오파트라와 동맹을 맺고 그녀를 왕위에 복귀시키며 로마-이집트 관계를 새로운 국면으로 끌고 간다.
로마로 돌아온 시저는 종신 독재관(Dictator Perpetuo)으로 임명된다.
이는 로마 공화정의 핵심 원칙—권력 분산과 임기 제한—을 스스로 무너뜨린 결정이었다. 그는 왕관을 거절했지만 이미 많은 이들에게 시저는 '왕보다 더 강한 존재'로 여겨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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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저의 죽음_브루투스, 너마저? (Et tu, Brute?)
기원전 44년 3월 15일, ‘이두스의 날(Idus Martiae)’.
그날 시저는 평소와 같이 원로원 회의에 참석하려 했다. 이미 몇몇 동료들은 이상한 징조를 감지하고 조심하라 충고했지만 그는 로마의 중심에서 여전히 권력을 쥔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질 수 있겠느냐는 듯 태연했다.
그러나 회의가 열린 원로원 홀에서 시저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찬사가 아니라 칼날이었다.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를 포함한 60여 명의 공모자들은 '공화정 수호'라는 명분 아래, 시저를 집단으로 찌른다. 그는 23번의 칼을 맞고 피를 흘리며 쓰러졌고 그 마지막 순간에 브루투스를 보고 외쳤다고 전해지는 말이 바로 이것이다.
"브루투스, 너마저? (Et tu, Brute?)"
이 장면은 단순한 개인의 죽음을 넘어 공화정과 군주정 사이의 갈등이 극에 달했음을 상징한다. 암살자들은 로마에 자유를 되돌릴 것이라 믿었지만 그들의 행위는 오히려 더 깊은 내전과 권력 투쟁을 불러왔고, 로마는 곧 아우구스투스(옥타비아누스)의 손에 의해 제국 시대로 접어든다.

시저는 왜 중요한가?
율리우스 시저는 생전에 황제라는 칭호를 공식적으로 가지지 않았지만 그의 이름 ‘카이사르’는 이후 모든 로마 황제들의 상징이 되었고 심지어 독일의 ‘카이저’와 러시아의 ‘차르’라는 단어로도 남게 된다.
그는 군인으로서 전장을 누비며 로마의 국경을 확장했고, 정치가로서 대중의 지지를 등에 업고 공화정을 무너뜨릴 만한 힘을 행사했다. 역사의 한 갈래에서 그는 독재자이자 반역자였고 다른 갈래에서는 개혁가이자 진정한 지도자였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가 루비콘을 건넜던 바로 그 순간부터 로마는 더 이상 예전의 공화정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는 점이다.
한 정치가의 결단은 결국 하나의 강을 넘게 했고, 그 강은 로마라는 문명의 흐름 전체를 바꾸어 놓았다.
시저가 던진 주사위는 단지 내전의 시작이 아니라 고대 세계의 중심이 새로운 질서로 재편되는 신호탄이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