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털루 전투와 나폴레옹 – 황제의 마지막 전장
돌아온 황제, 끝나지 않은 전쟁
1815년 3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엘바 섬을 탈출해 프랑스로 돌아왔다.
10개월 전 그는 연합군에 의해 패배한 뒤 엘바 섬에 유배되었고, 프랑스에는 왕정이 복원됐다.
하지만 루이 18세의 정권은 민심을 얻지 못했고, 왕정 복고에 대한 반감은 퍼져 있었다.
엘바에서 그의 귀환은 전광석화처럼 전개되었다.
상륙 후 만난 병사들은 그를 체포하기는커녕 지지했고, 파리는 열광하며 다시 황제를 맞이했다.
이른바 백일천하가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유럽 열강은 더 이상 그에게 기회를 주지 않았다.
영국,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러시아는 곧 제7차 대프랑스 동맹을 조직하고, 프랑스와의 전면전을 준비했다.
전장은 벨기에 남부의 워털루. 여기서 유럽의 미래가 판가름 나게 된다.
나폴레옹의 생애
1769년 코르시카 태생의 나폴레옹은 프랑스 혁명기를 거치며 탁월한 전술 능력을 인정받고,
1799년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다. 이후 1804년 황제로 즉위하고, 프랑스를 근대국가로 재편했다.
그는 나폴레옹 법전을 제정하고 행정, 교육, 군사 조직을 정비했으며,
유럽 각국을 상대로 한 전쟁에서 연전연승을 거두며 대륙 패권을 쥐었던 인물이다.
그러나 1812년의 러시아 원정에서의 패배는 그의 몰락을 예고했다.
60만 대군이 무너졌고, 그 여파로 이어진 1813년 라이프치히 전투에서도 패하며 유럽 내 주도권을 잃는다.
결국 연합군은 파리를 점령했고, 나폴레옹은 1814년 엘바 섬으로 유배되었다.
그는 독재자이자 개혁가였고, 침략자이자 조국의 영웅이었다.
그의 삶은 언제나 찬사와 비난의 경계에 있었고, 워털루는 그 모순이 정점에 도달한 순간이었다.
워털루 전장을 둘러싼 세 개의 힘
- 프랑스군 (지휘: 나폴레옹) 약 73,000명
- 영국-네덜란드 연합군 (지휘: 웰링턴 공작) 약 68,000명
- 프로이센군 (지휘: 블뤼허 장군) 약 50,000명
나폴레옹은 이들 연합군이 합류하기 전에 웰링턴을 먼저 격파하려 했다. 전형적인 각개격파 전략이다.
그는 벨기에 남쪽 워털루 지역에서 웰링턴군과 격돌한다.
하지만 그는 두 가지 변수, 진흙과 시간, 그리고 프로이센군의 도착을 과소평가했다.
전투의 흐름과 결정적 장면들
- 전날 폭우로 인한 진흙탕으로 전장의 기동성이 낮아졌고, 포병 운용에 차질이 생겨 공격은 오전 11시로 지연된다.
- 프랑스군은 측면 공세에 실패했고, 라 아이에 상탈 지역에서 병력 손실이 가속화되었다.
- 오후, 나폴레옹의 마지막 카드였던 제국근위대가 투입되었지만, 연합군의 집중 반격에 무너지며 사기가 꺾였다.
- 이어 블뤼허의 프로이센군이 도착하면서 프랑스군은 포위당하고 붕괴된다.
결국 해가 지기 전, 전장은 완전히 연합군의 손에 넘어간다.
돌아오지 못한 마지막 유배
나폴레옹은 파리로 퇴각했지만, 정치적 기반도 민심도 모두 등을 돌렸다.
그는 두 번째 퇴위서를 작성하고, 이번에는 대서양 한가운데의 고립된 섬 세인트헬레나로 유배된다.
그곳에서 그는 1821년, 51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다.
그는 두 번 유배되었고, 두 번째는 돌아오지 못했다.
그의 퇴장 이후, 프랑스는 다시 부르봉 왕가의 루이 18세를 왕으로 복귀시켰다.
이는 입헌군주제적 요소를 일부 수용한 보수적 왕정 체제였으며, 왕정복고기(1815~1830) 동안
유럽 전체는 보수와 반동의 기조 아래 재편되었다.
워털루가 바꾼 세계
워털루는 전쟁의 끝이자 시대의 전환점이었다.
- 프랑스는 왕정으로 회귀하고,
- 유럽은 빈 체제를 중심으로 보수적 질서를 강화하였으며,
- 민족주의와 자유주의는 당장은 억눌렸지만 19세기 후반 다시 불꽃을 일으킨다.
워털루는 한 사람의 몰락이 아니라, 하나의 세계관이 퇴장하는 무대였다.
역사는 때때로 사람을 넘어선 구조의 힘으로 움직인다. 그러나 그 중심엔 역사라는 이름을 부여받은 인간, 나폴레옹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