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혁명과 로베스피에르의 딜레마
도덕이 칼을 들 때, 혁명은 어디로 가는가?
프랑스 혁명은 자유와 평등을 외쳤지만, 공포와 의심 속에서 수많은 이들이 스러져갔다. 그 중심에 있던 로베스피에르. 그는 도덕을 믿었고, 그 믿음은 피를 불렀다. 오늘 우리는 그의 이야기에서, 정의란 무엇인가를 다시 묻는다.
1789년, 무너진 바스티유 감옥
프랑스 혁명은 1789년 7월 14일, 바스티유 감옥이 민중에 의해 함락되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 감옥은 실제로는 몇 명의 죄수만 수감된 곳이었지만, 왕권과 전제정치의 상징이었다.
이날은 지금도 프랑스의 국경일(La Fête nationale)로 기념된다.
하지만 혁명의 불씨는 그보다 오래전부터 피어오르고 있었다.
- 구제도(Ancien Régime) : 귀족과 성직자가 세금에서 면제되고, 평민에게만 부담이 전가된 사회 구조
- 경제 위기 : 루이 16세의 재정 파탄, 연이은 흉작, 밀가루 값 폭등
- 계몽사상 : 루소·볼테르·몽테스키외 등의 사상은 ‘국왕’보다 ‘국민’을 강조했다
그리고 이 시기에 한 변호사 출신 하원의원이 의회에 입성한다.
그의 이름은 막시밀리앵 로베스피에르(Maximilien Robespierre).

그는 누구였을까? – ‘도덕적 인간’ 로베스피에르
- 출생: 1758년, 프랑스 북부 아라스(Arras)의 중산층 집안
- 직업: 변호사 → 제헌국민의회 의원
- 철학: 루소의 ‘일반의지’에 깊이 심취
- 별명: ‘강직한 인간’, ‘공공의 친구’, 후에는 ‘공포의 화신’
그는 왕족이나 귀족이 아니었기에, 민중을 대변하는 정치인으로 빠르게 두각을 나타낸다.
초기에는 사형제 폐지, 노예제 반대, 언론 자유 등 극히 진보적이고 인도주의적인 주장을 펼쳤다.
그의 정치는 ‘권력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정의를 위한 것’처럼 보였다.
실제로 그는 극도의 청렴함으로 유명했으며, 사치와 부패를 혐오했다.

혁명은 왕을 넘어서 누구를 향했는가?
루이 16세는 1793년 1월, 국민공회의 결정으로 단두대에서 처형된다.
(재판 결과: 유죄 693표, 무죄 0표 / 사형 361표, 기타 334표)
하지만 그 순간부터 프랑스는 “왕 없는 나라”가 아니라 “질서 없는 나라”가 되었다.
- 외부에선 오스트리아, 영국, 프로이센 등 유럽 왕정들이 혁명을 진압하려 들었고
- 내부에선 지롱드파(온건공화파)와 자코뱅당(급진공화파) 사이의 권력투쟁이 치열해졌다
자코뱅당(Jacobins)은 프랑스 혁명기 대표적인 급진파 정당으로,
"모든 사람은 법 앞에 평등하다"는 원칙을 내세웠고, 공화주의와 강력한 중앙집권을 지향했다.
이들은 왕정을 완전히 폐지하고, 국민의회 중심의 직접 민주주의를 구현하고자 했으며,
특히 빈민 계층과 급진적 시민층의 지지를 받았다. 로베스피에르를 포함해 당통, 마라 등
혁명가들이 소속되어 있었고, 혁명의 중후반기 프랑스의 권력을 장악하며 공포정치를 이끌었다.
이 와중에 등장한 것은 ‘혁명재판소’였다.
로베스피에르는 말한다.
“혁명의 적은, 공공선에 반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처벌받아야 한다.”

공포정치는 어떻게 시작됐을까?
공포정치는 흔히 1793년 9월 ~ 1794년 7월까지로 정의된다.
이 시기 자코뱅당이 주도한 국가 기구는 다음과 같다.
- 공안위원회 (Comité de salut public)
- 혁명재판소
- 상대주의 법률(법률 제22조): "의심스러운 자는 체포하고 재판 없이 처형 가능"
실제 기록에 따르면,
단 1년 동안 파리에서만 2,639명, 프랑스 전역에서 16,594명이 단두대에서 처형됐다.
(이 수치는 The Oxford History of the French Revolution 등에 기반함)
희생자 중에는
- 귀족도 있었지만,
- 혁명을 지지했던 동지들,
- 무고한 시민들,
- 혁명의 온건파였던 당 지도자들까지 포함됐다.
공포정치의 논리는 다음과 같았다.
"정의로운 공화국을 만들기 위해, 부정의를 단호히 처벌해야 한다."
딜레마 : 정의를 지키기 위해 칼을 드는가?
로베스피에르가 두려워했던 것은 부패한 왕정이 부활하는 것도, 해외 세력의 침략도 아니었다.
그는 혁명의 이상이 흔들리는 것 자체를 가장 두려워했다.
그래서 그는 적을 정하지 않았다. 대신, ‘의심받을 만한 사람 전체’를 적으로 만들었다.
문제는 그 기준이 명확하지 않았다는 것.
심지어 그의 오래된 동료인 당통(Georges Danton),
그리고 날카로운 비판자 데무랑(Camille Desmoulins)도 처형되었다.
그가 ‘정의를 위해’ 내린 처형 명령은 결국 혁명의 동지들을 하나둘 제거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끝은 어떻게 왔는가?
1794년 7월 27일(프랑스 혁명력 9년 9월 9일),
로베스피에르는 체포되고, 다음 날 단두대에 오른다.
- 그를 지지했던 의원들은 그를 두려워했고
- 군중은 더 이상 그를 존경하지 않았고
- 혁명의 이상은 공포와 피 속에서 잊혀졌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자신이 만든 단두대의 마지막 희생자 중 한 명이 된다.
우리는 지금 무엇을 묻고 있는가?
프랑스 혁명의 역사는 단순한 민중 반란의 서사가 아니다.
그것은 “정의로운 이상이 어떻게 현실에서 무너지는가”를 보여주는
가장 집약적인 이야기다.
- 로베스피에르는 진짜로 이상을 믿었을까?
- 그는 끝까지 자신의 방식이 옳다고 생각했을까?
- 그는 독재자였을까, 아니면 비극적인 순수주의자였을까?

도덕이 극단으로 치달을 때
프랑스 혁명의 초기는 자유의 꿈이었고
중반은 정의의 투쟁이었으며
후반은 공포의 굴레였다.
로베스피에르의 딜레마는 바로 여기에 있다.
“이상주의자는 칼을 들 때,
그가 지키려는 이상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