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교양 한 스푼/단어의 유래

‘팬(Pan)’,공황(panic)의 어원

리안과의 만남 2025. 3. 26.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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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일상 속에서 ‘팬(pan)’이라는 단어를 아주 자연스럽게 만난다.

팬데믹(pandemic), 팬아시아(pan-Asia), 팬케이크(pancake),

심지어 팬오케스트라(pan-orchestra) 같은 표현까지도.
‘팬’이 붙으면 왠지 범위가 넓어지고, 모두를 아우르는 느낌이 든다.
하지만 이 단어의 뿌리를 하나하나 들춰 보면, 단순히 ‘전체’를 의미하는 접두사 이상의 무언가가 보인다.
그 바탕엔 고대 그리스의 자연신 ‘판(Pan)’의 흔적이 숨어 있다.


어원의 출발점 – 고대 그리스어 ‘πᾶν (pan)’

‘팬(pan-)’은 고대 그리스어 ‘πᾶν (pan)’, 즉 ‘모든 것(all)’에서 유래했다.
이 단어는 ‘pas’(모든)의 중성형으로, 라틴어로는 ‘omnis’, 영어로는 ‘all’에 해당한다.

그리스어 ‘pan’은 이후 라틴어를 거쳐 다양한 유럽 언어에 흡수되며 접두사로 정착했다.
그래서 현대 영어에서는 ‘pan-’이 앞에 붙는 순간, 그것이 전 세계적, 전체적, 혹은 보편적임을 의미하게 된다.

 

예를 들어,

  • pandemic = pan(모든) + demic(사람, 인구) →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질병’
  • panorama = pan(모든) + horama(풍경, 시야) → ‘모든 것을 조망하는 풍경’
  • pansexual = 모든 성적 정체성을 초월한 사랑의 개념

이렇듯 ‘팬’은 단순한 말머리가 아니라, 사유의 확장을 이끄는 언어적 신호이기도 하다.


그리고 신 판(Pan) – ‘모든 것’을 품은 야성의 신

흥미로운 것은 이 ‘pan’이 단순한 언어의 산물이 아니라, 하나의 신(Pan)에서 비롯되었다는 설이 있다는 점이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판(Pan)은 숲과 목축, 야생의 신이다.
하반신은 염소, 윗부분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대자연과 본능, 음악과 공포를 동시에 상징한다.

그 이름 Pan은 오랜 시간 동안 “모든 것을 다스리는 신(the god of all)”으로 해석되었다.

고대의 저술가 플루타르코스는 ‘판(Pan)’이라는 이름을 단순한 신의 명칭으로 보지 않았다.
그에게 판은 자연과 우주의 모든 것을 아우르는 상징적인 존재였고,
그 이름 속에는 ‘모든 것’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pan이 담겨 있다고 해석했다.
플루타르코스는 기원후 1세기경에 활동한 그리스의 철학자이자 역사학자, 윤리 사상가로,
그의 저작인 『영웅전(Parallel Lives)』과 『도덕론집(Moralia)』을 통해 고대 세계의 사상과 신화를 후대에 전해준 인물이다.


특히 스토아 철학자들은 판을 자연 그 자체로 의인화된 존재로 바라보기도 했다.

 

고대 도서관에서 두루마리를 읽고 있는 철학자 플루타르코스


판의 피리와 팬의 공포 – 'panic'의 어원도 여기서

‘팬’과 관련된 단어 중 하나로 panic(공황)도 있다.
이 단어는 바로 판(Pan) 신의 이름에서 비롯되었다.

신화에 따르면, 판은 전쟁 중에 적군을 혼란에 빠뜨리기 위해 기이한 소리로 적을 놀라게 하는 능력이 있었고,
그 소리를 들은 이들은 정체 모를 공포에 휩싸여 도망쳤다.

이때 생겨난 공포를 “panic fear”, 즉 ‘판의 공포’라고 불렀고, 이것이 현대 영어에서의 panic이 되었다.

재미있게도, 오늘날에도 우리는 설명하기 힘든 불안감이나 갑작스러운 두려움을 겪을 때
“공황 상태에 빠졌다”고 말한다.
그 속엔 판 신의 숨결이 은연중에 남아 있는 셈이다.

 

피리부는 신 판

 

판의 피리소리에 패닉에 빠진 고대 병사들


팬케이크와 팬플룻? – 단어가 같아도 어원은 다르다

한 가지 유의할 점이 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팬케이크(pancake)의 팬(pan)은
‘모든’이라는 뜻의 ‘pan’이 아니라, 조리도구 팬(frying pan)에서 비롯된 말이다.
즉, 팬 위에 굽는 케이크라는 의미다.

또한 팬플룻(pan flute)은 판 신이 피리를 불었다는 신화를 바탕으로
그의 이름을 딴 악기로 명명된 것이지, ‘모든 것을 아우르는 플루트’란 뜻은 아니다.
이는 신화에서 온 문화적 명명 방식으로 이해하는 것이 맞다.

 

팬케잌과 팬플릇


‘팬(Pan)’이라는 말의 문화적 확장

오늘날 우리는 ‘pan-’을 단순한 접두사로 생각하기 쉽지만,
그 안에는 언어적 기원과 신화, 철학, 문화적 상징이 혼재되어 있다.

 

팬데믹은 전 세계적 질병일 뿐 아니라, 우리가 모두 연결되어 있음을 상기시켜 주고,

팬오케스트라는 공식적인 음악 용어로 자리 잡은 것은 아니지만,
때때로 지역이나 문화의 다양성을 상징하는 문맥에서 상징적이거나 창의적인 방식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Pan-European Orchestra처럼 ‘팬(pan-)’을 통해 유럽 전체의 음악적 연대를 강조하거나,
‘Pan-Orchestra Festival’처럼 여러 문화권이 함께 어우러지는 음악 행사를 지칭할 때 등장하는 것이다.

 

또한 전혀 다른 맥락이지만, 카리브 지역의 음악 문화에서는
‘스틸팬(steelpan)’이라는 금속 드럼 악기를 중심으로 구성된 밴드를
‘pan orchestra’라 부르기도 한다.
이 경우 ‘팬’은 ‘모든 것(all)’이라는 뜻이 아니라,
‘스틸팬 악기’를 중심으로 한 연주 단체를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된다.

팬아프리카니즘(pan-Africanism), 팬슬라브주의(pan-Slavism)는 공동체적 정체성의 확대를 지향하는 단어다.

 


‘팬’이라는 짧은 단어 안에는
고대의 신화, 언어의 흐름, 인간의 사고방식까지 응축되어 있다.

말의 어원을 추적하는 일은 결국
사람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이해하는 여정이다.
오늘도 하나의 단어 속에서 오래된 이야기들이 조용히 숨 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