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로마 신화 다시 읽기/신들의 이야기

세계의 기원, 카오스와 코스모스

리안과의 만남 2025. 3. 20. 17:25

카오스와 코스모스 – 세계의 기원

그리스 신화에서 태초의 상태는 ‘카오스(Chaos)', 흔히 ‘혼돈’이라고 번역되지만,

실제로는 무정형의 공간, 틈, 모든 것의 가능성만이 존재하는 상태였다.

그리스인들은 이 ‘텅 빈 것’에서 세계가 시작되었다고 믿었다. 카오스는 어떤 실체도 없었지만,

무한한 잠재력을 품은 존재였다. 그 속에는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어둠과 침묵,

그리고 형태 없는 질서가 숨어 있었다.


이 개념은 천지창조 이전의 ‘혼돈(混沌)’과 같은 의미로,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상태를 뜻한다.
그러나 '무(無)'와는 다르며, 단순한 공허함이 아니라 질서가 존재하지 않는 원시적 상태였다.

카오스는 방향과 질서를 결정하는 기준이 없었다.
위아래, 앞뒤, 오른쪽과 왼쪽의 구별이 없었으며, 시간이 흘러도 세상은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이 혼돈 속에서도 점차 질서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그리스인들은 이 질서를 '코스모스(Cosmos)'라고 불렀다.
그리스어로 코스모스는 단순히 ‘우주’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아름답게 꾸며진 것’을 뜻하는 말이었다.
즉, 혼돈(카오스) 속에서 질서와 조화가 만들어진 세계를 나타낸다.

 

혼돈에서 질서로 Chaos to Cosmos

 

최초의 존재들 – 가이아, 타르타로스, 에로스

 

카오스가 나타난 뒤, 가장 먼저 스스로 모습을 드러낸 존재는 가이아(Gaia)였다. 그녀는 대지의 여신이자, 만물의 터전이자, 생명의 어머니였다. 가이아는 단순히 땅이 아니라, 땅의 의지였다. 그녀는 형태를 지녔고, 공간을 열었으며, 이후 태어날 모든 신과 생물, 인간들의 기반이 되었다.

 

가이아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살아 있는 존재였다. 그녀는 자신의 몸 위에 생명을 품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무도 시키지 않았지만, 그녀는 자신으로부터 새로운 존재를 낳기 시작한다.

 

이어 등장한 존재는 타르타로스(Tartaros)였다. 그는 지하 세계의 심연으로, 훗날 죄를 지은 신들과 괴물들이 갇히는 장소가 된다. 그는 위로 뻗은 가이아와는 반대로, 아래로 깊이 침잠한 존재였다. 이로써 ‘위와 아래’라는 세계의 구조가 생겨났다.

 

세 번째로 나타난 존재는 에로스(Eros)였다. 그는 지금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큐피드나 사랑의 신의 모습이 아니다. 고대의 에로스는 훨씬 더 근원적이고 추상적인 힘이었다. 에로스는 존재와 존재를 끌어당기게 하는 결합의 본능, 우주를 움직이게 만드는 충동, 창조의 핵이었다.

 

에로스가 태어나자, 가이아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에로스의 힘은 그녀로 하여금 우라노스, 즉 하늘의 신을 낳게 했다. 우라노스는 가이아를 덮고, 그녀를 감싸며 대지와 하늘의 결합을 이룬다. 이것이 세상 최초의 ‘짝’이며, 신화에서 ‘남성과 여성’, ‘위와 아래’, ‘하늘과 땅’이라는 개념이 형성된 순간이다.

 

어둠과 밤의 탄생 – 에레보스와 닉스

가이아가 탄생하고, 우주의 결합을 이끄는 에로스가 등장한 후, 카오스는 또 다른 존재들을 낳는다. 그것은 어둠의 신 에레보스(Erebos)밤의 여신 닉스(Nyx)였다.

 

에레보스는 시야를 가리는 어둠이 아니었다. 그는 아직 빛이 도달하지 않은 세계, 존재와 존재 사이의 공백을 상징했다. 닉스는 그 어둠을 품고 떠다니는 밤의 여신이었다. 그녀는 검고 고요한 날개를 가진 여신으로, 침묵 속에 머무르며 세계에 어두운 질서를 드리웠다.

 

닉스는 단순한 ‘밤’이 아니었다. 그녀는 무서움, 고요함, 죽음, 예언, 운명의 어머니였다. 『신통기』에 따르면 그녀는 혼자 힘으로 수많은 개념적 존재들을 낳는다. 죽음(타나토스), 잠(히프노스), 꿈(오네이로이), 불화(에리스), 운명(모이라이) 등… 그녀의 자식들은 이후 세계의 근본적인 원칙들을 상징하게 된다.

 

에레보스와 닉스는 함께  빛의 신 아이테르(Aether)낮의 여신 헤메라(Hemera)를 낳는다. 이로써 밤과 어둠으로부터 낮과 빛이 태어난다. 이제 세상은 시간의 흐름을 갖 되고, 빛과 어둠이 서로를 밀어내며 존재한다. 밤이 지나면 낮이 오고, 낮이 지면 밤이 온다는 순환의 원리가 생겨난 것이다.

 

신들이기 이전에 ‘개념’이었던 존재들

초기의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이 최초의 존재들은 지금 우리가 아는 인격적이고 감정을 가진 신들과는 달랐다. 그들은 자연과 세계를 구성하는 개념이 신격화된 존재였다. 어떤 신은 위대한 힘을 가졌지만, 형체조차 없었고, 어떤 신은 대지를 걸으며 살아 있는 생명처럼 묘사되었다.

 

카오스는 무정형의 공간, 존재의 가능성 그 자체였다.

가이아는 대지 그 자체였으며, 모든 생명의 모태였다.

타르타로스는 깊이 아래 가라앉은 심연, 혼돈의 심층이었다.

에로스는 우주의 결합을 가능케 하는 충동이었다.

닉스는 밤이며 예언과 죽음을 품은 고요한 힘이었다.

에레보스는 그림자이며 어둠, 형체 없는 공포였다.

 

이들은 ‘신’이라기보다는 ‘세계를 구성하는 조건’이었다. 신화는 이들을 통해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세계의 원리를 시각화했다. 그리고 그 형상화는 단지 상상의 놀이가 아니라, 철학이자 우주론이며, 믿음이었다.

 

질서의 시작, 이야기의 문이 열리다

카오스에서 가이아가 나오고, 타르타로스와 에로스가 태어나고, 어둠과 밤에서 빛과 낮이 이어지며 세계는 점차 구분과 질서를 갖추기 시작한다. 세상은 더 이상 무의 바다에 떠 있는 것이 아니라, 상하좌우와 흐름, 시간과 공간이 구분되는 구조를 갖추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세상에는 ‘위’와 ‘아래’, ‘낮’과 ‘밤’, ‘빛’과 ‘어둠’, ‘사랑’과 ‘두려움’이 생겼고, 그 사이에서 다음 세대의 신들과 생명들이 무대를 준비한다. 최초의 신들은 등장했고, 그들 사이에는 이미 감지되지 않는 긴장감이 흐르기 시작한다.

 

이야기의 시작은 끝이 없는 어둠에서 비롯되었지만, 그 어둠 안에 있었던 ‘틈’은 무언가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었다. 그 틈은 세상이 생성되기 위한 조건이자, 탄생의 문이었다. 이제 우리는 하늘과 땅의 결합에서 태어난 자식들과, 그들을 둘러싼 최초의 갈등과 반란의 이야기로 들어가게 된다.